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대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 과정 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1952년 8월 병풍 투표소.png|width=100%]]}}}|| ||<:>{{{-1 피란길에 천막과 병풍을 둘러 마련된 임시 투표장에서 유권자가 투표하고 있다.}}} || 전시임에도 당시 한국 인구 2천만 명 중 유권자가 8백 20만 명인데, 7백 20만 명이 참여(88.09%)한 선거로써, 역대 세번째로 높은 선거 참여율을 보여주고 있다.[* 역대 최고의 참여율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의 94.38%, 두번째는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의 89.15%이다.] 기호 2번 '''[[이승만]]''' 후보가 다른 후보들을 큰 표차로 앞서고 당선되었다. [[부산정치파동]]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갈 수 있겠지만 사실 전시의 경우 대부분의 [[민주주의]] [[국가]]에서는 집권 [[여당]]을 잘 바꾸지 않는 성향이 있다. 이를테면 [[미국]]의 [[우드로 윌슨]]([[제1차 세계대전]])과 [[프랭클린 D. 루즈벨트]]([[제2차 세계대전]])이 있는데, [[이승만]]의 경우도 일단 이것에 해당된다. 이른바 '전쟁 중에는 장수를 교체하지 않는다.'라는 논리가 통한 셈이다. [[이승만]]의 측근이었던 [[이범석]] 초대 총리가 [[자유당]] 소속으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당선이 유력시되었는데, 이후 이승만과의 사이가 틀어져 이승만 쪽에서 [[무소속]] [[함태영]] 후보를 적극 지원하여 함태영이 이범석을 꺾고 당선되었다. 이승만 정권 때 치러진 선거는 정부가 경찰력을 동원하여 선거에 깊이 개입하는게 일상이었는데 이범석에 대한 낙선 시도도 여기에 해당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